54년간 교장으로 살아온 이선재 교장,“우리학생들은 시대의 숨은 공로자”

▲ 마포 일성여중고등학교 이선재 교장선생님. 사진/마포땡큐뉴스 DB

[마포땡큐뉴스 / 이승재 기자] 어려서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여성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일성여자중고등학교.

1952년 야학으로 시작, 지금은 일성여중고라 불린다.

이선재 교장은 1952년 야학으로 시작해 53년 고등공민학교시절을 거쳐 지금의 일성여중고의 교장선생님을 맡고 있다.

이학교에는 10대 청소년부터 80대 할머니까지 모여 공부를 하고 있다.

이선재 교장은 이학교에 다니는 노년의 학생들을 이시대의 숨은 공로자라 표현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6.25를 거쳐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바로 우리 일성여중고 동문들”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이들이 어려서부터 학교를 다니는 대신 오빠와 남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열심히 공장을 다니면서 집안에 보탬이 돼 결국은 이시대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시대의 숨은 공로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정을 나눠주면 학생들이 되돌려 줍니다”

이선재 교장은 독특한 인생관을 피력했다. 그는 “세상을 살아보니까 이타적으로 사는 것, 남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결국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게 되더라”며 "진심 어린, 땀 냄새 나는, 인간적 대우를 학생들 모두에게 골고루 해주라고 선생님들을 독려한다”고 말했다.

“정을 나눠주면 학생들이 되돌려준다니까요?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50년 전 졸업한 학생도 찾아오고 야학시절 친구도 찾아오고 그래요. 그러니 내게 도움이 되고 결국 이기적인 게 되는 거죠”

이 교장은 ‘나눔’을 실천하며 반평생을 살았다. 그는 일성여자중고등학교와 양원초등학교, 양원주부학교 교장으로서 만학의 길에 들어선 중년여성이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교장이 되기 이전엔 교사로도 학생을 지도해왔다.

고생한 사람일수록 성공에 집착할 만도 한데 그는 다른 길을 결심했다. 받은 만큼 베풀겠다고 마음먹은 것.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 야학활동과 청년운동에 나섰다.

“당시엔 고아가 꽤 많았어요.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새까만 얼굴로 거리를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지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더군요. 내 모습 같아서…, 나도 어렵게 공부한 사람이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분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을 했었는데 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은혜를 갚는 길이다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다리 밑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야학을 시작한 겁니다”

야학을 하던 중 일성고등공민학교가 노천수업을 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뜻을 모은 이들과 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1960년대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시기다.

그는 재정적으로 학교를 지원해줄 수 있는 독지가를 찾았다. 자신의 호주머니도 털었다. 처음엔 학교를 살려놓고 그만둘 계획이었는데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을 데리고 교사들과 함께 일성고등공민학교 교단에 서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으로 일성여자중고등학교는 이 교장의 평생터전이 됐다. 지난 50여년 동안 인연을 맺은 제자만 5만명 이상이다.

▲ 올해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수여하는 이선재 교장. 사진/마포땡큐뉴스 DB


야학교사로 첫발…50여년간 제자만 5만명

처음 학교 살림은 예상대로 어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 반에 30명, 40명 있는 게 아닙니다. 70명, 80명 되는 규모에요. 그런데 그 중에서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은 다섯도 안 됐어요. 공동수도에서 물을 퍼다 놓으면 쉬는 시간마다 물독이 바닥을 드러내는 거에요.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은 학생들이 계속 물만 떠 마시는 거죠” 그 와중에도 이 교장은 "한두 끼 굶어 죽지 않는다. 그래도 배워야 산다"를 매일 아침 학생들과 복창하고 수업을 시작할 만큼 열성을 보였다.

“그렇게 굶으면서도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앉아 있는 걸 보면 말이죠. 여길 떠날 수가 없더라고요"

스스로 “반 미친 사람처럼 일했다”고 젊은 날을 회상하는 이 교장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운도 따랐다.

혼자 힘으로 학교를 꾸리기는 힘들었지만 일성고등공민학교에는 10년 동안 무보수로 교장을 맡아준 스승과 17년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독지가도 있었다. 그런 이들 덕분으로 이 학교는 지금의 학교로 자리를 잡았다.

▲ 일성여중고 재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사진/마포땡큐뉴스 DB


한국의 페스탈로치 이선재

이 교장 이름 앞엔 ‘한국의 페스탈로치’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평생을 교육자로 헌신한 것도 한 이유이지만 그만의 교육철학도 그만큼 주목할 만하다. 이 교장은 문맹을 인권과 연관 짓는다.

그는 “배움은 그 자체로 인권인 학습권이자 행복추구권”이라고 주장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내가 가는 곳마다 언제나 주인이 되라는 의미”라며 “선생님들에게도 학생은 왕, 교사는 왕사(王師)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나이 많은 학생과 젊디젊은 교사가 보기 좋게 어우러진 이 학교에서는 실제 ‘상호존중’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배움에서 배제돼온 여성…이들에게 기회 주고파”

학교 이름인 ‘일성’은 구한말 이준 열사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준 열사는 "천하에 제일 위험한 것은 무식이요. 또 천하에 제일 위험한 것은 불학"이라는 유훈을 남긴 바 있다.

이 학교 학생 다수는 머리 희끗한 중년여성으로 어린 시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배움의 시기를 놓친 이들이다. 처음엔 문맹을 없애자는 취지로 문을 연학교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 다수가 여성으로 채워졌다. 그만큼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20-50클럽’에 가입한 나라입니다. 인구 5000만, 국민 소득 2만불 이상인 나라가 세계 일곱 개 밖에 없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에요.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게 누구 덕입니까? 그 숨은 공로자가 지금 우리학교에 있는 학생들이에요. 먹을 거 못 먹고, 따뜻한 옷 못 입고, 잠 한번 편히 못 자고, 손등 터지고 발등 터져가면서 일하고 돈 벌어 오빠 동생 가르친 겁니다”

이 교장은 자신이 해온 일이"학력 없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못 배운 게 한이 되고, 설움이 되고, 고통이 되고, 불편이 되고, 부끄러움이 된 분들입니다. 그런 설움과 불편을 안고 50~60년을 살아오신 분들이에요. 지식에 목마르고 지식에 배고파서 온 사람들. 그러니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이고 이 분들 자극만 제대로 주면 쭉쭉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 전부 능력이 있는데 기회를 놓쳤을 뿐이에요. 기회만 주면 훨훨 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재능을 왜 썩힙니까?”

실제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의 실력은 남다르다. 이 학교는 10년 연속 고등학교 졸업생 전원 대입 합격률 100%를 자랑한다.

“생각해봐요. 일반 중고등학교는 3년 다니죠? 그리고 과외도 하죠? 우리는 2년을 배우거든요. 학원도 안 다녀요. 그런데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가거든요. 그 정도로 다들 열정적으로 공부합니다. 열정만큼은 우리 학교가 최고라고 자부해요”

▲ 일성여중고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마포땡큐뉴스 DB


이 교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1988년부터 글쓰기를 권장했는데 지금까지 82명이 문단에 등단했어요. 국내 유명대학 국문과라고 해도 이 정도 시인은 안 나올 겁니다. 대단하죠?”

이 교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나 보람 있는 순간을 지목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는 제자와 보람 있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다. 그의 대답엔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는 인식이 자리한 것으로 보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만 다룰 게 아니에요. 눈에 잘 띄지는 않더라도 사회 구석구석엔 자기역할 을 성실히 맡아온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기사를 내주세요. 우리 언론이 잘못된 게 뭐냐면 잘 나가는 사람 위주로 다뤄요. 1등만 존재하지 2등은 알아주지 않아요”


“겨울방학 2주 동안 손편지 500통 받는 사람 있나요?”

이 교장은"이들이야 말로 우리 사회, 우리 역사의 진짜 주인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공한 삶의 잣대는 ‘부’나 ‘승진’이 아닌 ‘인적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나하고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 다 정규 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임했거든요.그런데 그 친구들은 예순둘 되면 역할이 끝나잖아요. 나는 아니에요", "이번 겨울방학 때도 학생들에게서 편지만 500여통 받았어요. 그런데 방학이 2주일이잖아요. 그러니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요. 그걸 전부 읽어주고 답장을 해야 하잖아요. 처음엔 정규학교가 아니라고 수군댔는데 이제는 나만 보면 ‘이 교장이 부러워’라고 이야기해요”라며 흐뭇해 했다.

이 교장의 두 아들 역시 교편을 잡고 있다. 한명은 대학교수로, 또 한명은 양원주부학교에서 근무 중이다. 그의 남다른 인생관은 가족의 이해 덕에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81세의 고령이지만 힘닿는 데까지 교육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없다. 이 교장의 꿈은 소박하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참스승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세속적 잣대와는 무심하게 거리를 둬왔지만 그는 누구보다 성공한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끊임없이 졸업생들이 찾아와줘요. 그리고 배움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 게 결국 보람이죠. 내겐 학생 전부가 특별한 사람입니다”


국내에 비문해자(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 600만명 넘어

“우리나라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비문해자가 6~7백만명 정도 됩니다”

“정부가 577만명이라고 얘기 하지만 실제론 그보다 더 많아요. 우리나라는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잖아요? 그래서 정부에서 돈도 대주고 공부를 시키는 무상교육이지만 고등학교는 그렇지가 않아요", "고등학생이 되면 정부에서 나오는 돈이 거의 없고 학부모들이 낸 돈으로 공부를 하죠. 하지만 우리 일성여중고학생처럼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은 시설도 모자라고 교원도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정부가 구조적복지, 생산적 복지만 따질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적 문제점을 교육적복지 측면에서 해결해야 해요"

"그러나 많은 정치인들이 앞장서 해결해 보겠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가슴에 와 닿는 그런일은 생기지 않더라구요"

이선재 교장은“내 몸이 다할때 까지 일성여중고를 위해,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갈무리 했다. 

저작권자 © 땡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