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와의 사이에 4남 2녀

홍성남 작가

조조를 영웅으로 만든 무선황후 변씨
 
무선황후武宣皇后 변씨卞氏(160~230)는 낭야군?耶郡 개양현開陽縣 사람으로 조조의 두 번째 부인으로 문제 조비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조조의 시첩侍妾 이었다. 이후 부인夫人으로 자리를 잡고 조조가 위왕이 되면서 위왕후魏王后가 되었고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면서 황태후皇太后가 되었다.
 
조조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187~226년)와 둘째 임성왕任城王 조창曹彰(?~223년), 셋째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192~232년), 넷째 조웅曹熊(?~220년, 조졸)을 두었다. 딸은 헌제에게 시집 보낸 조절曹節과 조화曹華를 낳았다.
동한말기,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백성들의 삶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되어 살기 힘들었다. 당시 변씨는 20세 가까운 나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예인藝人 이었다. 그녀 또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을 물려받은 가무기歌舞伎였다. 부모를 따라 낭야 개양(현재 산동 임기)에서 전전하다 초현(안휘)까지 흘러 들어왔다.
 
조조는 돈구령을 맡고 있던 기간에 매부에 연좌되어 관직을 잃었다. 병을 칭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책을 읽고 사냥을 하며 숨어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조조는 시인답게 음률을 아주 좋아했다. 가무기인 변씨가 재색을 겸비한 것을 보고 첩으로 들였다. 그후 조조가 낙양에서 북도위로 있는 동안 변씨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초현으로 돌아갔다. 187년 그녀는 첫 아들 조비를 낳았다.
 
189년 조조는 효기교위驍騎校尉(근위 기병을 지휘하던 무관직) 벼슬을 하던 중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한다. 남루한 미복으로 도망쳤다. 이때 어떤 사람이 변씨가 있던 초현으로 와서 조조가 이미 죽었다는 흉보를 전했다.
조씨 일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엄격한 연좌제가 있던 시절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했으니 관군이 곧 들이 닥칠 것이기 때문 이었다. 대다수의 옛부하들과 식솔들이 짐을 꾸려 조씨 집안을 떠나려고 준비했다.
 
이때 28세의 변씨가 말했다. “내 남편 조조의 생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오늘 흩어져 떠났는데 내일 조조가 돌아와 있으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서로 얼굴을 보려는가. 화가 닥치면 함께 죽으면 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조씨 집안의 식솔들은 그대로 남아 변씨의 지시를 따랐다. 변씨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나름 안목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안일을 잘 처리했다. 변씨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전까지는 낙담하지 않고 돌아올 남편을 위해 집안의 식솔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216년 조조는 한 헌제로부터 위왕魏王에 봉해진다. 219년 조조는 변부인을 왕후王后로 올린다.
왕후 제수의 사령서는 다음과 같았다. “부인 변씨는 여러 자식을 양육함에 있어서 어머니의 모범이 될 만한 덕을 갖고 있도다. 이제 그 관위가 왕후로 승진하여 그 의식을 행하니 국내에서 사형죄를 받은 사람도 그 죄를 한 등급 덜어 주겠노라.”
조조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가 친정으로 쫒겨간 정부인은 고집이 세고 자부심이 강했다. 예전에 변왕후에게 욕하며 변씨 부자를 괴롭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왕후가 된 후에 옛날의 원한을 잊고 정부인에게 자주 물건을 보냈다.
 
조조가 집에 없을 때는 정부인을 집으로 모셔 오기도 했다. 정부인을 윗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두 여자의 정경이 예전의 모습 이었다. 정부인은 변왕후에게 고마워했다. 정부인의 소행으로 봐서 원한을 살만도 한데 변왕후는 정부인을 살뜰이 챙겼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조조가 예쁜 귀걸이를 몇개 구해 가져왔다. 변왕후에게 먼저 고르라고 했다. 그녀는 잠깐 살펴본 후 중간등급의 귀걸이를 하나 골랐다. 조조는 의아하여 물었다. 그러자 변왕후가 대답했다. “좋은 것을 고르면 탐욕스러운 것이고, 나쁜 것을 고르면 가식이다. 그래서 가운데 것으로 고른 것이다.”
 
조비와 조식이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변왕후는 모른 척 했다. 천명에 맡기며 결과를 지켜봤다. 마침내 태자의 자리가 조비로 결정 되었다. 곧바로 변왕후에게 축하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위서魏書에 의하면 장어長御가 변후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장군께서(당시 조비는 오관중랑장) 태자를 제수 받은 이래 온 세상의 사람들이 기뻐하니, 왕후께서는 창고의 귀중한 보물을 그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이때 변왕후는 아주 담담히 말했다. “왕은 조비가 나이가 많으니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나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허물이 없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행일 뿐이다. 그게 무슨 크게 기뻐할 일이겠는가.”
 
장어가 돌아와서 이런 사실을 조조에게 낱낱이 알렸다. 조조는 변왕후의 이 같은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화가 났을 때 얼굴색이 바뀌지 않고, 기쁠 때 기품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며 그녀답다고 말했다.
 
변왕후는 허창으로 간 후에 매번 봄이 되면 고향의 청매靑梅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어지러운 시절에 고향의 청매를 맛볼 기회가 없었다. 조조는 그런 변왕후의 모습을 보고 고향의 청매나무를 몇 그루 집 근처의 구곡하변에 옮겨 심게 했다. 이후 청매가 익는 계절이 되면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변왕후는 매우 기뻐 활짝 웃으며 그 뜰을 자주 걸었다. 조조는 청매나무 가운데 정자를 지었다. 청매정이란 정자 이름도 직접 지어줬다. 이후 청매정은 가장 격이 높은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가 되었다. 변왕후와 조조는 부부의 인연을 뛰어 넘는 지기知己와 같았다.
 
220년 조조는 건안 25년에 병사한다. 조조가 붕어하자 문제가 즉시 왕위에 올랐다. 변왕후의 존호를 왕태후王太后라고 했다. 이어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왕후의 존호를 황태후皇太后로 올렸고 거처 하는 곳을 영수궁永壽宮이라고 일컬었다.
 
220년 황초(1대 조비) 연간에 문제가 변태후의 부모에게 작위를 추증하려고 했다. 상서 진군陳群이 상주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성현의 덕망이 있어 천명을 받들어 제위를 올랐으며, 지금은 업을 일으키고 구제도를 혁신하는 시기로써 마땅히 후세의 영원한 법식法式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전적에 있는 조문에 의거해 보아도 부인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고 작위를 수여한 예는 없습니다. 예전禮典에서도 부인은 남편의 작위에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진왕조는 옛날의 법도를 어겼는데도 한왕조가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식이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말했다.
 
“이 상주문이 옳으니 이전의 명령을 시행하지 말라. 그리고 이 상주문을 책으로 만들고 조칙을 내려 그것을 대각臺閣(관행에 기록한 문서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에 깊숙이 넣어 두어 영원히 후세의 법식이 되도록 하라.”
그런데 이런 문제의 명령은 명제가 즉위하자 달라졌다. 손자 조예의 황제 등극으로 당연히 변태후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다.
 
230년 태화(2대 조예) 4년 봄 명제는 문제의 전적을 어기면서 곧바로 태후의 조부 변광卞廣에게 개양공후開陽恭侯라는 시호를 내렸고, 태후의 부친인 변원卞遠을 경후敬侯, 조모 주씨周氏를 양도군陽都郡에 봉했으며, 경후의 부인들에게도 모두 작호爵號와 인수印綬를 수여했다.
변태후의 동생 변병卞秉은 조비 시절 공적이 있어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이어 226년 황초(1대 조비) 7년에 개양후開陽侯로 승진 되었다. 식읍 1천2백호를 받았으며 소열昭烈장군이 되었다.
 
위서에 의하면 일찌기 변황후의 동생 변병은 196년 건안(후한 14대 유협) 연간이 되어서야 별부사마가 되었는데, 변황후가 항상 조조(위 태조)에게 동생의 벼슬이 낮다고 원망하는 말을 하자 조조가 변병에게 “단지 그대가 나랑 얽혀서 위왕과 처남이 된 건데 오히려 많은 게 아니냐.”고 했다.
 
이에 변황후는 조조가 변병에게 돈과 비단을 더 내려주길 원했다. 그러자 태조가 또 말했다. “단지 그대가 훔쳐다 주는 것일 뿐인데 그래도 모자라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조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변병의 관직은 변함이 없었고 재산 또한 늘지 않았다.
 
변병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변란卞蘭이 뒤를 이었다. 변란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과 학식도 있었고, 일찍이 봉거도위奉車都尉와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산기상시散騎常侍로 봉해졌다. 변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변휘卞暉가 뒤를 이었다.
 
문황제 조비는 외가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위략에 의하면 태자 시절 변란이 태자太子의 미덕을 찬미한 부賦를 지어 바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賦란 묘사한 사물에 의탁해 일을 말하는 것이고, 송頌이란 성스런 덕盛德의 모습을 찬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자는 공허한 사구辭를 사용하지 않으며, 찬미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실에 맞아야 하는데, 변란의 부는 어찌 사실이겠는가. 옛날 오구수왕吾丘壽王은 정鼎에 대해 논술하고, 하무何武 등은 칭찬의 노래를 해 황금金과 비단帛을 하사받았다. 변란의 부의 내용은 감동시키는 바는 없어도 그 의도는 충분하므로 지금 소 한 마리를 하사하겠다.” 그 결과 변란은 친애親와 경의敬를 받았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문제를 비롯한 위나라 황제들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가 했다. “위 왕조의 후비들은 부귀를 얻었지만 쇠망한 한가의 외척과 달리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조정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위나라는 지난 일을 경계삼아 방법을 바꾼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진군의 주의奏議(왕에게 말한 의견서)와 잔잠棧潛의 책론策論을 회고하면 그들은 왕이 된 자의 규범을 만들어 후세까지 영원히 전하였다.”
 
문제와 달리 명제는 진외가인 변태황후 집안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위략에 의하면 명제 때 국외에 두 난적(오와 촉)이 있었고, 명제는 궁실宮室에 남아 있었으므로 변란은 항상 가까이서 모시며 자주 엄하게 간언을 했다.
 
명제는 그 의견을 따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진심만은 받아들였다. 나중에 변란은 알콜중독苦酒과 당뇨병消渴에 걸렸는데, 그 당시 명제는 무녀의 물을 이용한 치료법을 신뢰하여 사자에게 물을 가져가 변란에게 주도록 하였다.
 
하지만 변란은 마시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그 이유를 묻자 “병을 치료하는 데는 마땅한 치료약이 있거늘 어찌 제가 이것을 믿겠습니까.”라고 했다. 명제의 안색을 바뀌었는데도 변란은 끝까지 말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변란은 당뇨병이 심해져 죽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변란의 솔직한 발언을 좋아했다. 명제가 그를 면전에서 힐책했기 때문에 자살했다고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명제는 변병의 작위와 봉록을 나누어 변란의 동생 변림卞琳을 열후에 봉했다. 변림은 보병교위步兵校尉까지 이르렀다. 변란의 아들 변륭卞隆의 딸이 고귀향공(4대 황제 조모의 황제 되기 전 작위)의 황후가 되었으며, 변륭은 황후의 부친이 되었으므로 광록대부에 봉해졌고, 특진의 지위를 받아 저양향후雎陽鄕侯로 봉해졌다. 그의 처 왕씨는 현양향군顯陽鄕軍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변륭의 전처 유씨有氏도 순양향군順陽鄕君이 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황후의 친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변림의 딸 또한 진류왕陳留王(위나라 최후 황제 5대 조환曹魏이 서진 사마염에게 선양 한 뒤 강등되어 받은 작위)의 황후가 되었는데 그 당시 변림이 이미 죽은 이후이기 때문에 변림의 처 유씨에게만 광양향군廣陽鄕君의 작위를 주었다.
변왕후는 조조가 죽은 10년 뒤 230년 태화(2대 조예) 4년 5월에 병사했다. 그는 2개월 뒤 7월에 고릉高陵에 합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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