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작산에 비파나무 묘목을 심다

원래 자연이었던 그대여! 어서 오시라. 이 생기발랄한 자연의 품으로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살면 늘 시간에 압박받게 되고, 본인이 원치 않은 일들에도 속박 받고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감이 한 시도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조찬 · 오찬 · 만찬이라 하여 밥 먹는 시간에도 정치 · 사회 · 경제문제를 논해야 한다. 수없이 쏟아내는 법률안과 정책보고, 세미나에 대한 압박도 없어졌고 민원을 관철하기 위해 힘겨루기 할 일도 없어졌다. 그런데 서서히 이런 일들이 줄어든다면 준비라도 하지만, 어느 날 모든 것이 일시에 뚝! 하고 끊어진 것이니 당사자 입장에서는 몹시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변인들은 예견된 일이었다며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나 보다 더 분노하였다. 그러나 함께 세상을 원망해보았자 위로가 되지 못하였고, 어리석고 못난 인생 한풀이 하는 것 같아 출가하듯이 훌쩍 산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산으로 간 어부가 되어 스스로 은자의 삶을 택하고 보니 세상살이의 소음에서 벗어났고, 간소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으니 입고 먹는 게 자유로워졌다. 사람 불러 일하는 날 밭둑에 둘러 앉아 먹는 식사는 특식에 속하고, 대체로는 숲과 텃밭에 지천으로 있는 먹을거리로 한 끼 때우면 그만이다. 저녁때 샤워하고 빨아놓은 옷은 아침이면 마르니 뭘 입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농사 짓다보면 갑자기 농자재를 사러 읍내에 나가야 되는데 흙과 땀이 범벅이 된 채로 나갈 수밖에 없어 잠시 망설이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의례 그러려니 이해해주니 다행이고, 나무나 산새들은 내 모습을 보고 흉보지 않으니 좋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해서 살고 형식에 얽매임이 없으니 걸림이 없어졌다.

그런데 분명 의 · · 주 측면에서 볼 때 자유인이 된 듯한데, 거의 24시간을 농사짓고 살다보니 이 또한 너무 얽매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 중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쓸 수 없는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다. 만약, 내 자신이 하루 종일 농사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라 농사의 노예가 된 것이다. 니체가 말한 노예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시간개념이라기보다는 진정한 자아성찰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자기 주도적이지 못하고 남에게 이끌려 다니는 삶이며, 물질적 또는 심리적인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는 동안에도 단지 물질로 보상받는 것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노동에 집착하고 나를 돌보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이제 좀 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하였다. 작렬하는 햇볕 속에서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는 순간에도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을 읽고 자연의 소리를 듣고자 하였다. 누구의 간섭도 없지만 내 육신의 한계에 미칠 때 까지 노동하며 땀 흘리기도 하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기도 하고, 3천배를 올리며 내가 가진 의지의 한계를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점점 물리적 시간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자기 주도적 삶을 살 수 있는 비교적 자유인이 되었다.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벗 삼아 사니 의식이 깨어나고, 삶의 지향점은 뚜렷하게 나침반을 향하고 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자기 자신의 가치철학을 잃지않으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꾸준히 가고 있다면 분명히 자기 주도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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